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5.18 민주화운동/의문점 (문단 편집) ==== 2천 명 사망설 ==== >이러한 전두환의 특별살륙 명령으로 희생된 사망자는 2000여 명, 부상자 1만 1천명을 헤아리고 있다. -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2000명 설은 5.18 기간 중에 처음 제기되었다. 조선대민주투쟁위원회가 작성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이 글의 작성자는 [[김현장]]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수배자가 되었는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 영향을 끼친 바 있다.]이라는 유인물에서는 5.18 때 발생한 '''사망자가 2000여명, 부상자 1만 1천여명'''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이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꽤 많았었다. 5.18 때 발생한 [[5.18 민주화운동/학살|계엄군의 만행]]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솔깃한 주장이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5.18 진상규명과 전두환 정권 타도를 성토하는 유인물들에는 광주에서 2000명이 죽었다는 식의 내용이 들어가기도 했었고, 1987년 이한열 열사의 장례식 때 [[문익환]] 목사는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호명하면서 '광주 이천여 영령이여!'라고 울부짖기도 했다. 이런 주장에 대해 1985년 [[윤성민]] 국방장관은 국회 국방위원회에서 "'''사태 직후 사망 및 행방불명자로 신고된 인원이 2,000여명으로서 이 중에는 사망자, 체포구금자, 부상입원자, 피신자 등이 포함돼있었는 바, 이 인원이 사망자로 잘못 전파'''된 것으로 사료된다."면서 일축했다. 현재는 많은 역사학적 연구를 거치면서 2000여명 사망설을 믿는 사람은 많이 줄었다. 왜냐하면 사망자 2000여명을 뒷받침할 만한 의미있는 자료나 증언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망자 숫자 그 자체도 실제 밝혀진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를 고려한다해도 터무니없이 많다. 경향신문은 1995년 12월 14일자 신문에서 광주항쟁 당시의 사망자 숫자에 대해 말하면서 2000명 사망설에 대해 이렇게 썼다. >한참 뒤에야 근거가 부족한 주장으로 확인돼 빛을 잃긴 했지만 처음 나돈 것이 <2000명 사망설>. 80년대 광주에서는 이를 믿는 사람이 많았다. 동네 어른들이 "6.25 때도 이러진 않았다."며 제 눈을 의심한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살상과 사망, 중태자 처리 모습을 '''직접 본 시민들이 생각하기에, 2000명은 사실에 아주 가까운 숫자로 여겨졌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